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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번역/봄, 또 다시 트위터를 시작하였습니다. (完)

「봄, 또 다시 트위터를 시작하였습니다」오후 2시 정각

by 스타델라 2023. 7. 30.

「봄, 또 다시 트위터를 시작하였습니다」 (14:00 ~ 15:00)

 

※ 이하는 각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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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4 - "정신을 가다듬고 CM 촬영. 세계의 영웅을 모은다 「영웅사 대전」에 분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서번트 카탈로그」의 CM 촬영. 나의 대사는 "지금 등록하는 것만으로도 슈퍼 레어 「반영웅 야오야 오시치」를 얻을 수 있어!"야."

-  16세기 무렵 조성된 신흥도시 에도는 2평방 킬로미터 정도였던 당대 일본의 평균도시와 달리 약 44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규모 도시(나이토 아키라 지음, 호즈미 가즈오 그림, 이용화 옮김, 『에도의 도쿄』, 서울, 논형, 2019, p.189-190.)였으나, 인구에 비하여 거주 공간이 적었던 에도의 특성상 거리에는 주된 도로를 제외하고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가야(長屋)라 불리는 목조 주택이 밀집(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식민지 연구를 위한 전제로서의 식민모국 연구」, 『일본비평』, 제8권, 제2호, 2016, pp.248-281, p.256-257.)되어 있었던 탓에 화재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는 사건이 바로 야오야 오시치(八百屋お七) 사건이다. 야오야 오시치는 17세기 에도에 살던 야채가게의 딸로, 1682년 에도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자 야오야 오시치(이하 '야오야')의 가족은 전부 세이센지(正仙寺, 판본에 따라서는 엔죠지(円乗寺) 등으로 표기되기도 함)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야오야는 피난 간 절에서 절의 시동인 '이쿠타 쇼노스케(生田庄之助)'를 만나게 되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피난이 끝나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야오야는 이쿠타 쇼노스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하였고, 그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방화(마이클 파퀴 저, 박인균 역, 『지독하게 인간적인 하루들』, 서울, 청림출판, 2018, p.189.)를 일으키게 된다. 후일 이 사건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가 그의 소설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 1686)』에서 오시치(お七)와 기치사부로(吉三郎)의 사랑 이야기로 각색(고영란, 「사이카쿠(西鶴)의 호색물과 에로스 - 필부(匹婦)의 에로스 묘사 소고(小考) -」, 『일본학보』, 제103권, 2015, pp.175-192, p.188)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졌다.

 

2) 14:15 - "오전 행사가 끝나고 짐은 호화 특별 도시락을 먹었다. 냠냠. 역시 로마의 장어는 좋다……"

-  기원전 95년 경, 로마인 세르기우스 오라타(Sergius Orata, fl. c. 95 BC)가 인공 굴 양식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뒤 로마에서는 여러 종류의 수산물 양식이 붐을 이루게 되는데, 특히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가이우스 루키리우스 히리우스(Gaius Lucilius Hirrus)가 칠성장어와 곰치를 인공적으로 양식하는 데 성공(윤덕노 저,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서울, 더난콘텐츠그룹, 2020, p.320-321.)한 이후 양식 바다 생선 및 양식 민물고기가 로마인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리커피시, 굴, 민물장어 등이 로마 상류층에서 과하게 인기를 끌었던 것이 로마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기에 기원전 143년 이후에는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에 의하여 '리키니우스 사치금지법(Lex Licinia Sumptuaria)'가 통과(콜린 매컬로 저, 강선재, 신봉아, 이은주, 홍정인 공역, 『마스터스 오브 로마 가이드북 (증보판)』, 제2판, 제3쇄, 파주, 교유당, 2019, p.188.)되기도 한다.

 

3) 14:16 - "남은 시합은 로마식 기마전과 로마식 전차전과 로마식 해상 전투인가…… 마지막은 좋지 않구나, 해군 매우 약해."

-  물론 기원전 262년 오단갤리선(Quinqueremes) 100척과 삼단갤리선 20척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로마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의 도움을 받은 점(주경철 저, 『바다 인류』, 서울, 휴머니스트, 2022, p.138.)과 기원전 255년, 카르타고 봉쇄를 위해 파견된 로마의 무적 함대가 80척을 제외한 모든 전함을 상실하였던 점, 그 뒤 2년 뒤에는 리비아를 침공하고 돌아오던 또 다른 함대가 시칠리아 북쪽 해안에서 좌초(프리츠 M. 하이켈하임 저, 김덕수 역, 『하이켈하임 로마사』, 제2판, 제3쇄, 파주, 현대지성, 2020, p.182.)된 것을 근거로 로마의 해군이 매우 약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로마의 해군력은 로마 제국 시기에는 전혀 달라진다. 하이켈하임의 지적처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35 B.C.E)와 벌인 전쟁과 악티움 해전을 통하여 로마 해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로마 제국은 나폴리를 시작으로 알렉산드리아와 남 갈리아의 포룸 율리이 등에 해군기지를 건설(프리츠 M. 하이켈하임 저, 김덕수 역, 앞의 책, p.566.)하는 등으로 해군력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본문에 등장한 네로 클라우디우스(Nero Claudius Drusus Germanicus, B.C.E 38 - B.C.E 9) 무렵에는 해양 포유류가 헤엄치는 해수 저수지에서 나우마키아를 개최(나카가와 요시타카 저,임해성 역, 『빵과 서커스』 서울, 예문, 2019, p.245.)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3세기 중반에 지중해를 둘러싸고 등장한 새로운 세력에 의하여 서로마 제국의 해군력이 약화(자크 아탈리 저, 전경훈 역, 『바다의 시간』, 서울, 책과함께, 2021, p.79.)한 점도 있지만 그것은 본문에 등장한 네로 황제 치세는 아니므로 오히려 부적절하다고 보인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말한 '해군이 매우 약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